건강

대학병원 의사, 그만두면 Failure(실패자)가 된다는 말을 들었어요

조준호

· 일하며 자신의 경험을 글과 활동으로 나누는 사람

나무가 우거진 하노이의 거리, 오토바이들이 지나가는 모습

대학병원에서 전공의로 일하다가 그만뒀어요. 그 뒤로는 편의점에 가는 일조차 두려워 집에서만 지냈어요. 제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어 상담을 신청했고,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과 활동을 시작했어요. 지금은 다시 일하며 글을 쓰지만, 그 시간을 모두 극복했다고 말하지는 않아요.

해본 시도

서울시 청년 마음건강 지원사업 신청 · 개인·집단 상담 참여 · 감정일기 쓰기 ·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의 모임 참여 · 비영리단체 창립 참여 · 심리학 공부 · 당사자로서 목소리 내기 · 산문집 집필 · 다시 일하기

그만두면 실패자가 되는 줄 알았어요

대학을 졸업하면 대학병원에서 몇 년간 전공의로 일하며 수련을 받아요. 그 수련을 시작했을 때, 중간에 그만두고 나가는 사람은 Failure(실패자)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때는 저도 열심히 하면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잘하고 싶었고, 끝까지 해내고 싶었어요.

일도 힘들었지만, 그보다 힘들었던 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었어요. 그 때문에 점점 위축됐어요. 뭘 말해도 제가 잘못한 것 같았어요. 사실대로 대답해도 혼이 나고, 말을 하지 않아도 문제가 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러다 보니 누가 뭐라고 하기 전부터 제가 잘못한 게 아닌지 생각하게 됐어요.

부모님께 그만두고 싶다고 말씀드렸을 때도 조금만 더 버텨보라는 말을 들었어요. 어렵게 들어간 곳이니 끝까지 마쳤으면 하는 마음이셨겠죠. 저는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아들이고 싶었고, 일도 잘하고 싶었어요. 그 기대와 제가 더는 버티기 어렵다는 마음 사이에 있었어요.

쉬는 날을 기대하는 것조차 어려워졌어요

주말에도 갑자기 일이 생길 수 있어서 약속을 잡기 어려웠어요. 친구와 만나기로 해놓고 못 가게 되면 미안하잖아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힘든 건, 기다리던 시간이 없어지는 일이었어요.

토요일에는 놀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 그날을 기다리면서 버티게 돼요. 그런데 막상 쉬지 못하게 됐을 때 실망이 너무 컸어요. 그래서 아예 약속을 잡지 않게 됐어요. 기대할 일을 만들지 않는 쪽을 택했던 거죠.

마음은 점점 더 힘들어졌어요. 주변에 이야기해도 의사인데 뭐가 힘드냐는 반응이 돌아오곤 했어요. 제가 가진 직업 때문에, 지금 얼마나 힘든지는 잘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자랑스러운 아들이라는 모습을 내려놓아야 했어요. 그 사이에서 버티다가, 결국 극단적 시도를 하게 됐어요. 죽고 싶었다기보다 그저 쉬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정상적으로 생각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만둔 뒤에도 두려움은 남았어요

결국 대학병원을 그만두고 집에서 지내게 됐어요. 그런데 그곳을 떠났다고 해서 두려움이 바로 사라지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무서워졌어요. 누군가 저를 나쁘게 보거나, 제가 뭘 잘못했다고 말할 것 같았어요.

집에 먹을 게 떨어져도 바로 사러 나갈 수 없었어요. 다음 주 어느 날에는 편의점에 가야겠다고 미리 정했어요. 그만큼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거든요.

정해둔 날이 와도 아침에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 못 나가고, 점심에도 저녁에도 미뤘어요. 머릿속으로 계속 연습했어요. 라면을 고르고, 계산대에 올리고, 계산하고, 인사하고 나오면 된다고요. 그런데 계산하는 분이 저를 나무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겨우 편의점에 갔을 때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사람들이 다 저를 쳐다보는 것 같았어요. 계산만 하고 급하게 나왔어요. 연습했던 인사도 하지 못했어요. 집에 돌아와서도 심장이 빠르게 뛰고 식은땀이 났어요.

제 이야기를 말하고 정리하고 싶었어요

집에서는 생활이 불규칙했어요.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도, 씻는 것도 힘들었어요. 월세를 계속 감당하기 어려워져서 어머니께 도움을 청했고, 나중에는 본가로 들어갔어요.

그때도 제가 실패한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어요. 부모님이 다른 사람에게 제가 일을 그만뒀다는 사실 대신 잠깐 휴가를 왔다고 설명하시는 걸 듣고는, 지금의 저는 숨기고 싶은 모습인가 싶었어요. 그런 마음은 다시 저 자신을 탓하는 쪽으로 돌아왔어요.

온라인에서 저와 비슷하게 일을 그만두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봤어요. 그런데 좋은 직장에 들어가 놓고 왜 그러느냐는 반응을 볼 때마다 억울했어요. 겉으로 보이는 조건만으로는 그 사람이 겪은 일을 알 수 없잖아요.

그래서 상담을 신청했어요. 제가 겪은 일을 말하고, 저 스스로도 정리해 보고 싶었어요. 서울시 청년 마음건강 지원사업을 통해 상담을 받고, 다른 기관을 소개받아 찾아가기도 했어요.

도움을 구하는 과정도 쉽지는 않았어요

도움을 받으러 갔는데 다른 곳으로 가보라는 안내를 받고, 그곳에서는 다시 또 다른 곳을 소개받기도 했어요. 저는 어디에 가야 할지 몰랐어요.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힘든데, 제 상황을 다시 설명해야 했어요.

상담에서도 아쉬운 경험이 있었어요. 감정일기를 써보자는 제안을 받고 열심히 써 갔는데, 다음 시간에는 그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았어요. 무슨 말을 꺼낼지 고민하고 준비한 저에게는 허무한 일이었어요.

그렇다고 그 시도가 아무 의미 없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런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제가 밖으로 나가고, 다른 사람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니까요. 도움을 구하면서 겪은 어려움까지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래도 의사잖아요”라는 말 앞에서

집단 상담에서 제 이야기를 들은 분들이 힘들었겠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런데 제가 의사라는 걸 알게 되면 반응이 달라질 때가 있었어요. 그래도 의사이지 않느냐고요.

저는 의사로 일하다가 무너진 건데, 어떤 분들은 힘든 시간을 이겨내고 의사가 된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어요. 이미 가진 직업이 있으니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는 거죠. 하지만 그 직업이 있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직업을 밝히지 않고 지내기도 했어요. 제가 어떤 일을 하는지보다, 지금 어떤 상태인지 먼저 들어줬으면 했어요.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는 감각부터 필요했어요

여러 프로그램을 찾아보다가 비슷한 경험을 나누는 활동에 참여했어요. 그곳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에는 모임을 이어갈 비영리단체 ‘펭귄의 날갯짓’을 만드는 데 함께했고, 당사자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활동도 하게 됐어요.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나와 비슷한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감각이에요. 좋은 습관을 만들면 좋다는 것도, 밖으로 나가면 좋다는 것도 몰라서 못 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당장 그걸 할 힘이 없을 수 있어요.

그럴 때 대단한 사람이 어떻게 성공했는지 듣는 것보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걸 아는 게 먼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 혼자만 이런 게 아니구나, 내가 이상하거나 모자라서만 그런 건 아니구나 하고요.

상을 받았다고 해서 다 나은 건 아니에요

활동을 이어가면서 따로 심리학 공부도 했고, 그 공부가 우수 학습 사례로 뽑혀 상을 받기도 했어요. 밖에서 그런 모습만 보면 이제 잘됐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저는 지금도 진료를 받고 약을 먹고 있어요. 밤에 잠을 못 자거나, 마음이 먹먹해서 우는 날도 있어요.

전보다 나아진 부분은 있어요. 다시 일을 하고 있고, 좋은 선배를 만나 일할 기회도 얻었어요. 그래도 여전히 무서울 때가 있어요. 활동을 한다는 사실과 제 마음이 완전히 회복됐다는 건 같은 이야기가 아니에요.

저는 그대로인데, 사람들이 저를 부르는 이름만 달라지는 것 같아요. 일을 그만두고 집에 있을 때는 실패했다고 보고, 상을 받거나 밖에서 활동하면 성공했다고 봐요. 하지만 제 삶은 그 사이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어요.

그 시간을 실패라고 쓰고 싶지는 않았어요

제 경험을 담은 산문집도 썼어요. 그런데 글이 성공담처럼 읽히는 건 원하지 않았어요. 집에서 지내던 시간을 실패한 시간이나 반드시 벗어나야만 하는 시간으로 정리하고 싶지도 않았어요.

지금 그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읽을 수도 있잖아요. 제가 과거의 저를 실패한 사람이라고 단정하면, 그분에게도 지금 실패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다 극복한 사람이 아니에요. 지금도 힘든 날이 있고 치료를 받고 있어요. 그러니 저도 해냈으니까 당신도 할 수 있다고 말하기보다는, 저 역시 비슷한 일을 겪었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드러내기 어려운 경험을 쓰는 게 저에게 늘 좋은 일만은 아닐 거예요. 그래도 말하고 싶었어요.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이 혼자라고 느끼지 않았으면 하고, 제가 겪었던 일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쉬었음’ 시간의 끝을 남이 정하지 않았으면 해요

저도 상담을 받으며 언제쯤 다시 일할 수 있을지 물었어요. 편의점에 가는 것도 무서운데 어떻게 사람을 대하며 일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할지 몰라서 불안했어요.

그러다 자녀를 먼저 떠나보낸 한 어머님을 만났어요. 그분이 자녀가 힘들어하던 때 건넸던 말이 있어요. 하던 일을 그만둬도 괜찮다고, 작은 가게라도 하나 차려서 같이 살자고요.

그 말을 듣고 꼭 정해진 시간 안에 다시 일어서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회복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남이 정할 수 없어요.

지금 힘들어서 집에서 지내는 분들에게도 빨리 나오라고 재촉하고 싶지 않아요. 밖에서 보기에 괜찮아 보인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 나았다고 정할 수는 없잖아요.

저는 한 사람을 실패나 성공으로 나누고 싶지 않아요. 어떤 결과가 있었더라도 그건 삶의 일부이고, 그 사람의 삶은 계속되는 거니까요. 쉬어야 할 때는 충분히 쉬어도 된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쉬어야 할 때는 충분히 쉬어도 된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2026년 9월에 나눈 이야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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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프로젝트는 (사)유쾌한반란의 지원을 받아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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